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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짓, 왓 포 쁘라탑 창 정문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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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1661년 나라이 대왕(Narai the Great King)은 란나 왕국의 수도이던 치앙마이(Chiang Mai)를 공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가 아유타야(Ayuthaya)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이자 당시에 임신 중이던 치앙마이의 왕의 딸을 남겨두었습니다. 그가 피사누록에 치나랏(Chinarat)과 치나시 부처상에 경의를 표하러 갔을 때, 그는 공주를 데리고 같이 오려고 결심했습니다. 머지않아 공주는 포 쁘라탑창(Pho Prathap Chang) 구역에 도착해 두아(Dua)라는 이름의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아기에 대해 들은 나라이 왕은 수치심을 느꼈고 대신 아이와 공주를 프라 펫라차(Phra Phetharacha)의 아들과 아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소년을 나라이 왕의 아들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소년은 자라 왕의 군대로 들어갔고 결국 루앙 소라삭(Luang Sorasak)이 되었습니다. 나라이 왕정 말기에 루앙 소라삭은 프라 펫라차와 함께 나라이 왕을 몰아냈습니다.

이 기간에 프라 페타라차는 그를 아유타야의 왕으로 추대했고, 루앙 소라삭은 왕나 왕자가 되었습니다(현재의 명칭은 황태자와 유사함). 기원후 1703년이 되어서야 솜뎃 프라자오수아(Somdet Phra Chao Sua)로 널리 알려진 황태자가 산펫 7세로서 왕좌를 받게 되었습니다. 후에 왕은 그의 출생지를 왓 포 쁘라탑 창을 건설했습니다. 왓 포 쁘라탑 창은 후기 아유타야 시대의 예술과 건축의 본보기입니다. 아유타야 후기의 기타 우보솟(서품실)과 같이, 왓 포 쁘라탑 창의 우소봇은 여러 개의 창문이 나란히 나 있습니다. 문과 창문 틀의 디자인은 왓 쿠디 다오(Wat Kudi Dao)와 왓 바롬 부다 람(Wat Barom Buddha Ram)의 것과 닮았습니다. 세하 혹은 수도원에서 발견된 경계표지는 나라이 왕의 통치 이후에 발견된 것과 같은 양식에 속합니다.

유물들은 후기 아유타야 학파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형식과 크기가 매우 비슷합니다. 사찰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발견들은 후기 아유타야 학파의 미술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하지만 왓 포 쁘라탑 창의 정문은 후기 아유타야 시대에 다시 재건된 왓 라차부라나(Wat Ratchaburana) 혹은 아유타야에 있는 다른 사원의 문보다 크기는 훨씬 크지만 모양은 비슷합니다.